게으름에 대한 찬양 - 혁이네 란제리

게으름에 대한 찬양

도서

2020. 06. 14.

이처럼 오래 유지되어 왔고 종식된 지 얼마 안된 체제이니만큼 그것이 사람들의 사고와 견해에 깊은 흔적을 남겼으리란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근로의 바람직성과 관련해 당연시 여기고 있는 많은 내용들이 이 체제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산업 사회 이전의 산물이기 때문에 현대 세계에는 적합하지 않다. 현대의  기술은 여가를 소수 특권 계층만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공동체 전체가 고르게 향유할 수 있는 권리로 만들어 주었다. 근로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며 현대 세계는 노예 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가란 문명에 필수적인 것이다. 예전에는 다수의 노동이 있어야만 소수의 여가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노동이 가치있는 이유는 일이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여가가 좋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현대 사회는 기술의 발전으로 문명에 피해를 주지 않고도 얼마든지 공정하게 여가를 분배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기술은 만인을 위한 생활 필수품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을 엄청나게 줄였다.

오랜 세월 남자들은 여성의 숭고함이 우위에 있다고 인정해 왔고 권력보다도 더 바람직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여성들의 열세를 위로해 왔다. 그러나 마침내 페미니스트들은 권력과 숭고함, 그 둘 다 갖기로 작정했다.

누구도 하루 4시간 이상 일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세상에서는 과학적 호기심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호기심을 맘껏 탐닉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수준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든 배곯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젊은 작가들은 기념비적인 대작을 내는 데 필요한 경제력을 확보할 요량으로 감각적인 작품을 써서 주의를 끌어보려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실, 마침내 대작을 쓸 수 있을 만한 상황이 되었을 때는 이미 취향과 재능이 달아나고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대의 생산 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영원히 이어나갈 이유는 전혀 없다.

여가를 가진 인구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교육받은 인구이며, 또한 그 교육은 직접적 유용성을 가진 과학·기술적 지식뿐 아니라 정신적 기쁨도 목표로 했음이 틀림없다.

행동보다 사고에서 기쁨을 찾아 내는 습관은 어리석음을 막아주고 과도하게 힘을 추종하는 현상을 방지해 주는 보호막이며 불행할 때 평온을, 근심에 싸였을 때 마음의 평화를 유지시켜 주는 수단이다.

숙고하는 습관의 이점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가장 심오한 것에 이르기까지에 폭넓게 걸쳐 있다. 우선 벼룩 때문에 괴롭다든지, 기차를 놓쳤다든지, 함께 사업을 하는데 걸핏하면 싸움이 일어난다든지 하는 작은 번민들부터 생각해 보자. 이런 고민거리들은 영웅적 행위의 뛰어남이나 모든 인간적 불행의 덧없음에 비하면 별로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들로 보이기 쉽다. 그렇지만 바로 그런 일들에서 생겨나는 짜증들이 많은 사람의 좋은 성격과 즐거운 인생을 망쳐 놓는 것이다. 그럴 경우, 그 순간의 문젯거리와 약간의 연관이 있을 뿐인 동떨어진 지식(실제로 연관이 있든 그렇게 생각한 것이든 간에)에서 의외로 큰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설사 그 문제와 아무 연관이 없는 지식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현재의 골칫거리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는 데는 큰 도움이 된다.

진기한 지식은 불쾌한 일을 덜 불쾌하게 만들 뿐 아니라 즐거운 일을 더 즐겁게 만들어 준다.

필요한 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특정한 정보가 아니라 전체의 시각에서 본 인생의 목적에 관한 지식이다. 여기에는 예술, 역사, 영웅적인 사람들의 인생 접하기, 우주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은 한심할 정도로 우연적이고 하루살이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지식은 인간 특유의 것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이해하고 아는 힘, 도량 있게 느끼는 힘, 올바르게 사고하는 힘을 키워준다. 비개인적인 감정과 결합된 폭넓은 인식으로부터 비로소 지혜가 솟아나오는 것이다.

이 모든 문제들을 일거에 치유하려면 건축물에 공동체적 요소를 도입하기만 하면 된다. 독립된 작은 주택들과 집집마다 자기 부엌이 있는 공동 주택 단지들은 철거되어야 한다. 대신 그 자리에 중앙의 뜰을 중심으로 몇 동의 건물을 높이 쌓아 올리되 단, 일조를 위해 남향 건물은 낮게 한다. 공동의 부엌과 널찍한 식당, 오락과 회합과 영화 감상을 위한 회관이 갖춰져야 한다.

어린 아이의 행동을 끊임없이 금지하는 것은 아이가 훗날 불만 많고 소심한 어른으로 자라게 되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아이들이 성인의 환경에서 살고 있는 한, 사실 금지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공장에서는 과학화와 최대한의 노동분업이 이루어지는 반면 가정은 여전히 비과학적인 채로 남겨져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과중한 노동이 어머니에게 떠맡겨졌다.

어쨌거나 내가 주장해 온 것과 유사한 '협동 조합'의 건설은 크게 볼 때 대규모 사회주의 운동의 일환으로서만 가능하다. 이윤 동기만 가지고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윤 추구가 경제 활동을 규정하는 한, 어린이들의 건강 및 성격과 아내들의 신경은 계속 고통받게 될 것이다.

옛날, 한 자그만 읍에 정육점 주인이 있었다. 그는 다른 정육점들이 자신의 고객을 뺏어가자 몹시 격분했다. 다른 정육점들을 망하게 하기 위해 그는 읍내 사람들을 모두 채식주의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자신도 역시 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자 그는 깜짝 놀랐다. 이 정육점 주인의 어리석음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지만 사실 강대국들의 어리석음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다. 외국과의 무역이 다른 나라들을 살찌우는 것을 지켜본 강대국들은 일제히 관세 장벽을 세웠다. 그리곤 결국 자국도 경쟁국들 못지않게 피해를 보게 되자 모두들 당황했다.

우리 시대의 금융업자들은 금을 숭배하는 미신의 도움을 받고 있다. 금 준비금이니, 어음 발행이니, 인플레이션, 디플레이션, 리플레이션, 기타 온갖 전문 용어들을 나열하면 보통 시민은 놀라서 말문이 막혀 버린다. 그런 문제들에 대해 청산유수로 말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똑똑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느끼면서 그들의 말에 감히 의문조차 품지 못한다.

이러한 사태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민주주의 세력들이 금융의 중요성을 깨닫고 모두에게 폭넓게 이해될 수 있도록 금융 원리들을 간소화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현대 세계의 복잡성은 우리 시대 민주주의의 성공을 가로막는 장애물 가운데 하나로서,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 보통 남녀들이 현명한 여론을 형성하거나 나아가 어떤 전문가의 의견이 가장 고려할만한 것인가를 판단하는 일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드는 주범이다. 이 문제를 치유하려면 먼저 교육을 개선해야 한다.

힘을 가진 자들은 냉소적이지 않다. 자신들의 사상을 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압제의 희생자들도 냉소적이지 않다. 그들은 증오로 가득 차 있으며 증오란 것은 다른 강한 열정들과 마찬가지로 부수적인 일련의 믿음들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경제학과 그리스 시에서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증권 거래소에서 일할 수 없게 되어 있다면, 또한 정치가들은 반드시 역사와 현대 소설에서 상당한 지식을 갖추도록 되어 있다면, 세상은 그 얼마나 유쾌할 것인가!

획일성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전적으로 좋다거나 전적으로 나쁘다는 식으로 생각해선 안 될 것이다. 이러한 경향에는 단점도 있고 장점도 있다. 최고의 장점은 사람들이 평화적으로 협력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단점은 사람들로 하여금 소수를 박해하는 경향을 만든다는 점이다. 후자의 결점은 아마도 일시적일 것이다. 조만간 소수들이란 존재 자체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진지한 교육 이론이라면 반드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인생의 목적에 대한 부분과 심리 역학 즉, 정신적 변화의 법칙에 관한 부분이다.

개인적 차원의 문명은 지적인 자질과 도덕적인 자질로 이루어진다. 지적인 것으로는 최소한의 일반 지식, 자기 직업에 있어서의 전문 기능, 증거에 근거해 소신을 세우는 습관 등이다. 도덕적인 것으로는 공평무사하고 친절하고 자기 조절이 어느 정도 가능한 자질을 들 수 있다. 여기에 내가 한 가지 더 보태고 싶은 것은 도덕적인 것도 지적인 것도 아닌 심리적인 것에 가까운 요소이다. 바로 열정과 생의 환희다.

사회적 차원에서의 문명은 법의 존중,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의, 인류에게 영속적으로 해를 주는 일에 관계하지 않는다는 소신, 목적에 맞는 수단을 택할 지적 능력 등을 요구한다. 이러한 것이 교육의 목적이라면 교육은 결국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특히 어느 정도의 자유를 주어야 가장 효과적일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심리 과학의 문제로 귀착된다.

형식적인 예절은 야만인들 사이에서 가장 크게 발전하고 선진 문화가 들어선 곳에선 줄어들게 마련이다.

내가 생각하는 타인에 대한 배려란 필요한 일을 기꺼이 공정하게 분담하고자 하는 마음, 모든 것을 고려하여 불화를 없애는 방법들에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말한다.

일부 자유 주창자들이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아이들의 집단이 성인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고 방치될 경우, 거기엔 강자의 압제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대부분의 아이들의 경우 저절로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권위를 발휘하지 않고는 가르치기 힘든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성인들이 포기해선 안 된다는 입장의 가장 중요한 근거일 것이다.

부모의 압제─흔히 지나치게 열성적인 애정의 형태를 띠기 쉽다─때문에 제멋대로 되어 버린 아이들에겐 완전한 자유의 기간을 경우에 따라 길게 혹은 짧게 줄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에야 아이들은 어떤 성인이든 의심하는 마음 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정에서부터 분별 있게 훈련된 아이들은 사소한 일에서 제지받는 것을 참아낼 수 있다. 자기가 지금 도움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느낄 수만 있다면 말이다.

만일 당신이 많은 사람들이 말이나 개에 대해 가지는 애정처럼 조건 없는 애정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한다면 아이들은 당신의 제안에 쉽게 반응할 것이고 금지 사항들도 쉽게 받아들일 것이다.

바람직한 관심이란 아무 목적 없이 아이들과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끼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자질을 가진 교사라면 아이들의 자유에 간섭할 필요도 별로 없겠지만 혹시 필요한 경우가 있다 해도 아이들에게 심리적 상처를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호의가 존재하는 곳에는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두고 미리 규율부터 내세우는 일은 불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호의라는 충동이 자연스럽게 올바른 결정으로 이끌어 갈 것이고 당신이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이가 느낀다면 어떤 결정이든 대체로 올바를 것이기 때문이다. 규율이란 제 아무리 현명한 것이라 해도 애정과 접촉을 대신할 수 없는 법이다.

이성에의 호소는 권력이 소수의 독재자들에게 확실하게 한정되어 있을 때 보다 용이하다. 18세기 영국에서는 귀족들과 그 친구들의 여론만이 중요했으며, 그러한 여론들은 늘 합리적인 형태로 포장되어 다른 귀족들에게 제시되었다. 정치 참여층이 점점 확대되고 이질화되면서 이성에의 호소도 점점 어려워진다. 논쟁의 출발점이 되는,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가설들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보편적인 가설들이 존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직관에 의존하게 된다. 이질적인 집단들의 직관들은 당연히 서로 다를 것이므로 직관에의 의존은 결국 충돌과 힘의 정치로 이어지게 된다.

교외에서 잠자고 대도시에서 일하는 거대한 인구를 상상해 보라. 기차를 타고, 노동자 계층과는 아무 연대감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수많은 주택가들을 지나 런던으로 출근한다. 그러한 주택가에 사는 남자는 지역 일에는 전혀 참여하지 못한다. 고용주의 지시에 따라 하루 종일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주말마다 뒷마당의 정원을 가꾸는 일뿐이다.

하나의 보편적 진실이 있다는 생각은 이미 꺾긴 지 오래다. 영국적 진실, 프랑스적 진실, 독일적 진실, 몬테네그로적 진실, 모나코 공화국을 위한 진실만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임금 노동자들에겐 그들만의 진실이 있고 자본가들에겐 자본가들만의 진실이 있다.

공산주의 국가의 지배 계급에게는 '민주주의' 국가의 자본가 계급보다 훨씬 더 큰 권력이 주어진다. 그 계급이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한 자기 계급의 이익을 위해 그 힘을 쓰려 할 것이다. 그러한 이익이 자본가 계급의 이익보다 해롭지 않을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기독교에서는 이론으로나마 개별 인간의 영혼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타인들의 영광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고 정의해 왔다. 현대 민주주의의 힘은 기독교의 그 같은 도덕적 이상에서 나왔으며, 통치 세력이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것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파시즘은 고대 우상 숭배의 최악의 형태로 복귀한 것이다.

만약 독재자가 본래 인간적 연민이 없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지나치게 무자비할 것이며 비인간적 목적을 추구함에 있어 어떤 잔인한 짓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이론이 강요하는 비참함에 대한 동정심으로 괴로워한다면 아마도 좀더 잔인한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든가, 아니면 자신의 인간적인 감정을 억눌러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그러한 갈등을 겪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잔학해지기 쉽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인류가 이러한 기형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선 1. 자유로운 성장, 2. 자기 마음대로 해보기, 3. 훈련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삶이 필수적이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와 인내가 요구되는 궁극적인 이유인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사회주의는 격퇴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들을 가리켜 적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계급 전쟁을 설파하고 다니는 것을 볼 때면 그들은 자연히, 그 전쟁을 아직 자신들에게 권력이 있을 때 시작하고픈 심정이 된다.

사회주의 개척자는 국가로부터 땅을 빌려 손수 통나무집을 지을 수 있는가?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이 뉴욕에 초고층 빌딩을 세울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유 재산을 굳이 법으로 금지할 필요는 없다. 다만 사적인 투자만 금지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자를 받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므로 개인이 소지하기 적당한 정도의 소액을 제외한 사유 재산은 점차 사라지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경제력을 개인이 소유하게 해선 안 되지만 경제력을 부여하지 않는 정도의 사유 재산은 잔존시켜도 좋을 것이다.

부에 대한 욕망은 대부분 안전에 대한 욕망에서 기인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늙고 쇠약해졌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 또는 자식들의 사회적 계급이 추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돈을 모으고 투자한다.

보다 심각한 해악은 다수 사람들의 생계가 무익한 것에 묶여지게 된다는 것이다. 부자들의 소비는 그에 기생하는 인구들을 다수 양산하게 된다. 그들 자신은 부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상품을 사주는 게으른 부자들이 없으면 자신들이 망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힘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에 의존해 삶으로써 그들은 도덕적으로, 지적으로, 예술적으로 고통받는다.

상업적 동기 때문에 문학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가는 작가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강직한 작품들은 일부 집단을 화나게 만들기 일쑤고 그 결과 판매가 부진해진다.

세계는 지금, 술버릇을 고치려 애쓰고 있지만 연신 술을 권하는 친절한 친구들에 둘러싸여 번번히 옛 습관으로 되돌아가고 마는 술꾼과도 같은 상태에 있다. 이 경우, 그 친절한 친구들은 그의 불행한 주벽으로 인해 득을 보는 자들이므로 그가 술버릇을 고치기 위해선 먼저 그 사람들부터 제거해야만 한다.

나는 문명의 제1의 본질적인 성격으로 '예견'을 꼽고 싶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고 어른을 아이와 구분하는 주요 기준이다. 문명을 지식과 예견의 결합에서 나오는 생활양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예견 ≒ (현재의 고통/미래의 쾌락) * 둘 사이의 시간

대체로 농경 형태가 언제나 고도의 문명을 대표해 왔고 종교와도 관계가 깊었다. 그러나 유대 종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은 족장들이 가진 소와 양떼였고 그 영향은 기독교까지 이어졌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농부보다 목동이 더 덕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선전의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은 현대에 들어서까지도 주로 농경에 기초해 있었다.

유대인들의 도덕에 대한 열정으로부터 기독교의 윤리적 지침이 나왔고, 그리스인들의 연역적 추론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신학이 나왔으며, 로마의 제국주의와 법 체계를 모델로 교회의 중앙집권적 지배와 교회법 체계가 생겨났다.

결국 위대한 진보의 시대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에게 달려 있었다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이 활약하는 데는 물론, 다양한 사회적·정치적 조건들이 '필수적'이었지만 그러나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 없이도 그 조건들은 흔히 존재해 왔었지만 진보는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세에 빚지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대의 정체이다. 이것은 대제국의 통치를 피지배자들 스스로가 선택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최초의 제도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 같은 제도가 성공한 곳에서는 고도의 정치적 안정을 누렸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대의 정체가 지구상 모든 곳에 적용할 수 있는 만병 통치약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실제로 그것이 성공한 곳은 주로 영어권 나라들과 프랑스에 한해서라고 볼 수 있다. (1930년대 당시)

죽음이 존재하는 세상에 적응하려 애쓰는 젊은이들에게. 첫째, 죽음은 말하고 싶지도 않고 생각해 보라고 권장하고 싶지도 않은 주제라는 느낌을 그들에게 주어선 안 된다. 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요즘의 성교육 방식을 응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젊으니들이 죽음의 문제를 두고 많이 혹은 자주 생각하는 것을 가능한 한 막아보려 해야 한다. 셋째, 의식적인 사고만으로 죽음이란 주제에 대한 만족할 만한 태도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리란 희망을 버려야 한다.

아이가 "내가 죽어요?"라고 물어오면 "그래,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그런 일은 없을 거야."라고 대답한다. 죽음에 대한 신비감을 갖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능한 한, 아직 어린아이들에겐 죽음이란 대단히 먼 일인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것이 가장 좋다.

아이에게 중요한 누군가가 죽었을 때는 문제가 다르다. 예를들어 아이가 형을 잃었다고 해보자. 부모는 슬픔에 젖을 것이고 자신들이 '얼마나' 슬퍼하는지 아이가 눈치채길 바라진 않겠지만 사실은, 부모가 고통받는 게 '어떤 것'인지 아이가 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 필요하다. 꾸밈없는 애정은 대단히 소중한 것이므로 아이는 어른들이 그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부모가 초인적인 노력으로 자신들의 슬픔을 아이에게 드러내지 않는다면 아이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엄마 아빠는 내가 죽어도 상관하지 않을 거야.' 이런 생각은 온갖 병적 발달의 출발점이 되기 쉽다.

만일 사랑했던 그 사람이 죽는 일이 생기면 그 아이의 인생은 산산히 깨질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머니나 아버지는 자신이 그런 종류의 애정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기쁨을 느껴선 안 된다. 그러나 성인이 된 후의 생활이 만족스럽기 위해선 청년기에 죽음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죽음의 중요성을 최소화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것을 초월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냉정하게 사고해야 한다.

"그래, 좋아.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거지?"

성인으로 살아가면서 진정 마음으로부터 이러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으려면 청년기에 아낌없는 열정으로 젊음을 불태우고, 자신의 인생을 걸 만한 직업을 가지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이들은 때로는 약간 엄하기도 한 어른이 자신들에게 가장 좋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자신들이 사랑받고 있는지 아닌지를 본능으로 느끼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한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자신의 적절한 발달을 진심으로 소망하면서 보여 주는 엄격함이라면 어떤 것이든 참아낼 수 있다.

불행이 닥쳤을 땐 아직도 살아야 할 이유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견뎌내도록 가르쳐야 한다.

'무용한' 지식은 개인들에게 커다란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러한 지식의 추구를 가능케 해주는 것은 바로 '사색하는 습관'인데 여기에는 게으름이 요구된다.

러셀이 주장하는 핵심은 노동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인생의 목표라면 사람들은 노동을 즐길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볼 때 실제 노동하는 사람들은 틈만 나면 일을 피하려 한다. 오직, 타인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만이 노동의 가치를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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