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陽花 - 혁이네 란제리

紫陽花

기록

2019. 12. 22.

#1

선생님은 여학교 4학년때 광복을 맞이하셨는데 당시 방직공장에서 군복 수선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8월 15일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만세를 외치던 때, 사람들이 왜 그렇게 기뻤는지는 잘 몰랐다고 하셨다. 세뇌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라고. 당시 젊은 세대들에게 臣民으로 사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고, 선생님은 전쟁중에 "일본이 지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물론 학교 다닐때 일본인 선생(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는데 내가 기억이 안난다)이 조선인을 차별했었고, 일본인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인은 고추장을 먹어서 어쩌고저쩌꼬.

#2

조선인 교사가 1/3, 나머지는 일본인 교사였는데, 舎監을 포함하여 일본인 교사들은 다같이 모여 엉엉 울었다고 한다. 조선인 교사들은 그제서야 기세등등해져 저것들 셈통이라며 흉을 보았다고 한다.

#3

광복 후 일본 학생들이 쓰던 제일여고(분명치 않다)가 비워지고, 조선 학생들이 그 학교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1인당 책걸상 1개씩 들고 광화문대로를 한줄로 걸어 이동했다고. 힘들었지만, 일본 학생들이 썼던 시설만큼 수영장도 있고 좋았다고 한다.

#4

좌우 대립이 심해질 때, 젊은 남교사 하나가 월북하였는데 여학생들이 줄줄이 따라갔다고 한다. "사상이 그렇게 무서운 거야. 가족도 버리고 다 같이 올라가버렸어."

#5

6.25가 터질 땐 선생님은 20대였는데,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고 한다. 대전서부터 헌병이 지키고 못 내려가게 막았다고. 여성들은 헌병들에게 겁탈을 당할까 무서워 얼굴에 흙을 묻히고 다녔다고 한다. 피난길 집이 모두 비어있었기 때문에, 아무 집이나 들어가 밥해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굶주리지 않았다고 한다.

#6

남동생이 공산당에게 맞아 정신착란이 일어났고 굿도 해보고 교회도 성당도 갔으나 못고쳐 피난길에 명의를 찾아갔다고 한다. 의사는 길바닥에 있는 철조각을 주워 끓인 물을 먹이라 했고 3달을 끓여 먹이니 나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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